회사에서는 눈에 띄지 않는 회계팀 부장, 집에서는 딸과 대화 한 번 제대로 이어가기 어려운 아빠.
그런데 그 평범한 남자의 과거가 전설적인 특수요원이었다면 이야기는 이미 절반쯤 재미있다. SBS 금토드라마 ‘김부장’은 이 익숙한 설정을 숨기지 않는다. 대신 더 빠르고, 더 세게, 때로는 놀랄 만큼 유쾌하게 밀어붙인다.
10부작이라는 짧은 호흡도 이 드라마와 잘 맞았다. 오래 고민하기보다 바로 문을 걷어차고 들어가는 작품이니까.
아빠가 다시 위험한 남자가 되는 순간
김부장은 딸 민지를 위해 요원 생활을 접고 평범한 가장으로 숨어 산다. 하지만 민지가 학교폭력 사건에 휘말린 뒤 흔적도 없이 사라지면서 오래 잠들어 있던 감각이 깨어난다. 경찰의 절차도, 국가기관의 허락도 기다릴 수 없다. 딸이 위험하다는 사실 하나로 그는 다시 ‘66번’이 된다.
초반의 재미는 여기서 터진다. 회사 책상 앞에서는 어딘가 답답해 보이던 남자가 골목과 창고, 조직폭력배의 아지트에 들어서는 순간 전혀 다른 얼굴을 보여준다. 안경을 고쳐 쓰고 낮은 목소리로 경고하는데, 상대는 늘 그 말을 너무 늦게 알아듣는다. 뻔한데도 기다리게 되는 장면이다. 솔직히 이런 드라마에서는 악당이 말을 안 듣는 편이 훨씬 고맙다.
혼자보다 셋일 때 더 재미있는 아빠들
김부장에게 성한수와 박진철이 합류하면서 드라마의 온도가 달라진다. 세 사람은 과거에는 살벌한 실력자였지만 현재는 자녀 눈치를 보는 중년 아빠들이다. 서로의 실력을 누구보다 잘 알면서도 입으로는 끊임없이 깎아내리고, 위기 앞에서는 말보다 몸이 먼저 움직인다.
이 조합이 좋은 이유는 액션 사이에 숨 쉴 틈을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김부장의 묵직함, 성한수의 능청스러움, 박진철의 거친 에너지가 부딪힐 때 ‘김부장’은 단순한 복수극에서 버디 코미디로 슬쩍 방향을 튼다. 셋이 모이면 국가급 작전도 동네 아빠들의 대환장 모임처럼 보이는 순간이 있다. 그 엇박자가 꽤 사랑스럽다. 누군가를 지키겠다는 마음이 꼭 비장한 표정으로만 표현되는 것은 아니라는 듯하다.
같은 아빠, 전혀 다른 선택
주강찬도 딸을 위해 움직이는 아버지다. 그래서 김부장과의 대립은 단순한 선악 구도보다 조금 더 흥미롭다. 김부장은 딸을 지키기 위해 자신을 버리고, 주강찬은 딸을 지킨다는 명분으로 다른 사람의 자녀를 희생시킨다. 둘 다 사랑을 말하지만 그 사랑이 향하는 방식은 정반대다.
이 지점에서 드라마는 뜻밖에 묵직해진다. 가족을 위한다는 말은 때로 가장 따뜻한 문장이지만, 누군가에게는 가장 위험한 면죄부가 되기도 한다. ‘김부장’이 끝까지 주강찬을 단순한 괴물로만 그리지 않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사랑은 크기보다 방향이 중요하다는, 조금 서늘한 질문이 남는다.
개연성보다 먼저 오는 타격감
물론 모든 전개가 촘촘한 것은 아니다. 남북 관계와 특수임무국, 재벌 권력까지 판이 커지면서 이야기가 급하게 이어지는 구간도 있다. 조연의 감정이 액션을 위한 장치처럼 지나가기도 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다음 장면이 시작되면 불만이 잠시 사라진다. 이 드라마는 논리보다 타격감, 설명보다 등장 타이밍을 믿는다.
현실에서는 절차와 책임이 얽혀 쉽게 끝나지 않는 악을, 김부장은 몇 분 안에 정리한다. 시청자가 원한 것은 완벽한 첩보극보다 답답함을 대신 걷어차 줄 한 사람에 가까웠는지도 모른다. 하루 종일 참는 일이 익숙해진 사람에게 이 과장된 응징은 꽤 정확한 위로가 된다.
안경을 벗고도 김부장인 사람
마지막에 김부장은 공식적으로 죽은 사람이 되고, 민지 앞에 다시 나타나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안경을 벗은 얼굴은 더 이상 회사원 김부장의 위장이 아니다. 국가가 붙인 번호와 임무에서 빠져나와 한 사람의 아버지로 돌아온 얼굴에 가깝다.
그런데 그는 완전히 평범해지지 않는다. 다시 백호인력을 찾아가는 엔딩은 이 남자의 다음 전장을 슬쩍 열어둔다. 가족을 되찾았지만 위험한 능력까지 버린 것은 아니다. 그래서 결말은 끝이라기보다 잠깐의 퇴근처럼 느껴진다.
‘김부장’은 아주 새로운 드라마는 아니다. 대신 익숙한 재료를 가장 맛있게 볶아낸다. 중년 배우들의 액션, 아빠들의 티격태격(개인적으로 가장 재미있었던 요소), 악당을 향한 빠른 응징, 그리고 가족이라는 오래된 감정까지...
최종회 전국 시청률 23.0%는 거대한 비밀보다 분명한 재미를 선택한 결과처럼 보인다. 머리로 오래 분석하기보다 다음 회 버튼을 누르게 만드는 힘. 가끔은 그런 드라마가 필요하다. 화면 속 누군가라도 대신 참지 말아주는 이야기.
